기억담론의 대두

1980년대 이래 서구세계에서는 강렬한 ‘역사적 체험이 역사 무대의 뒷전으로 영영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세계대전과 나치의 학살이 경험했던 세대가 차츰 사라져가고, 혁명의 성난 파도도 가라앉아감에 따라 역사는 생생한 체험의 양상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영화 나 소설에 나오는 아득한 옛이야기로만 느껴지게 되었다. 비록 1980년대가 끝나가면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는 낡은 민족분쟁이 재연되었을 뿐, 진정으로 역사의 충만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는 못했다. 근대적 역사의식의 본령은 민족주의였다. 강고해만 보이던 민족주의는 걷잡을 수 없는 세계화의 물결로 인하여 점차 수세적 입장에 몰리게 되었다. 심지어는 통일된 독일에서마저도 민족적 결속력은 별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권위를 얻어가고 있는 유럽적 정체성은 아직 일부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의 머릿속에서만 효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화는 민족뿐만 아니라 국가, 계급, 종파등, 전통적 집단에 대한 긴밀한 유대감을 앗아갔다.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지역주의나 개인주의는 본래적 의미의 역사에는 잘 부 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역사는 더 이상 우리 존재의 보편적 규준 이 되지 못하고 오직 개별자나 특정집단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동품적인 대상으로 격하된다.

기억담론

결국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역사가 현실적 효용성을 찾은 유일한 영역은 대중들의 여가생활이다. 이른바 ‘문화재산업 (heritage-industry)’ 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버려진 옛 궁터나 귀족의 영지(領地), 마을, 각종의 폐허가 원래의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오직 상업적인 관점에서 단장되고 소비된다. 이처럼 역사는 기껏해야 문화재’의 형태로 존속하게 되며 급기야는 과거에 대 한 향수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관광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기억산업(memory industry)’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때의 기억이란 생생한 기억이 아니라 단지 기억의 대용물을 지칭할 뿐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잘 포장된 문화재와 더불어 각종 광고와 상표, 샘플, 모델, 복제물, 재활용품 등이 마치 떨칠 수 없는 악몽처럼 반복해서 등장한다. 자본의 순환은 기억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는 동시에 내적으로 파괴한다. 결국 종래에 역사가 누리 던 문화적 권위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소비풍조나 오락거리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추세에 단단히 한몫한 것이 바로 새로운 전자매체의 급속 한 발전이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및 전세계적인 연결망을 가진 인터넷의 출현은 지식의 유통 지수와 저장용량을 천문학적으로 확대시켰고, 이에 따라 과거에 신성한 후광을 띠고 있었던 지식이 이제는 임의적으로 복제 처분 가능하며 오직 개수(個數) – 바이트(byte)로 환원되는 ‘정보’로 강등되었다. 또한 무제한의 시청각적 이미지들 이 범람하면서 이른바 ‘가상현실’이 현실을 압도하는 양상이 빚어졌다. 현대문명은 첨단기술의 권능으로 부활한 신화의 세계이다. 물 론 그것을 지배하는 힘은 신성함이 아니라 오락성이라는 점에서 고 대의 신화세계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부활된 것은 결국 신화가 아니라 신화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이러한 전반적 양상은 역사의식 의 고양을 위해서는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망각이기보다 오히려 편집증적인 집착이다. 데이터베이스에 더 많은 자료가 저장되고 더 많은 시뮬레이션이 가동될수록 역사적 진리의 권위는 실추된다. 항시 임의적으로 접근 가능한 디지털 방식의 기억장치, 즉 램(RAM, random access memory)’이역사적 진리를 압도하면서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현실과 가상의 차이는 사라진다.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현재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되어버린다.. 물론 이처럼 과포화 상태의 현재에는 문예이론가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동경했던, ‘지금 이 순간의 시간(Jetztzeit)’ 의 영적 충만함이 없다. 그 시간을 창조적으로 영위하는 ‘(역사적) 주체’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무한대의 정보와 영상 이미지의 연쇄뿐이다. 결국 이러한 양상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 바로 기억에 대한 탐닉이다. 문화이론가 호이센(Andreas Huyssen)은 그의 유명한 저서 『황혼의 기억들(Twilight Memories)』에서 근간에 만연하고 있는 ‘기 억에 대한 강박증적인 몰두가 시간 개념의 와해로 말미암은 일반적 위기의 증상이며, 이질성과 비공시성(非共時性), 과도한 정보로 넘치는 혼잡한 세계에서 안식 터를 찾으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기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 내적 연관성이 없이 임의적으로 조작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외부의 시간 질서에 기대지 않고 각 개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rich Beck)이 역설적으로 표현했듯이, “자기 고유의 삶을 위한 일상적 투쟁이야말로 서구세계의 집단체험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기억에 대한 증가된 관심은 현대 서구문명의 본원적 위기 가 낳은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기억은 과거와의 개인적 관계를 주선한다. 역사가 공공성을 띠는 반면에 기억은 그것의 사적 (私的)인 대응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억은 대개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서 개별적인 양태로 존재하는 만큼 즉자적이고, 임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기억의 강세는 민족이나 국가, 계 급, 종파 등과 같은 집단적 주체의 과거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반증한다. 이제 과거는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이나 향수, 또는 오락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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