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정체성

알박스에게 기억이란 결코 확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집단기억이 비록 ‘전통’의 이름으로 특정집단에게 장기간 뿌리를 내려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천적으로 상상적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서 정치적인 편의에 따라 쉽게 조작될 수 있다. 이런 점 에서 볼 때 알박스의 견해는 다분히 비판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기 억이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집단 기억이 과연 개인적 기억을 충분히 포섭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별 로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에 이를수록 집단기억과 개인사는 점점 더 분리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처럼 집단기억이 개개 구성원들의 자연발생적인 의사소통과 유리되고 더 이상 그들에게 ‘생생한 기억’ 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기억을 구축하는 작업이 요청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알박스의 지적은 충분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억에 대한 보다 진전된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전승을 위한 다양한 문화적 형식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얀 아스만(Jan Assmann)과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 부부가 제시한 문화적 기억’ 개념이 매우 유용하다.

기억은 문화적

독일에서 기억에 대한 문화과학적 논의를 이끈 아스만 부부는 알 박스와 달리 기억이 문화적 창조물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억이 문화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연발생적이기 보다 오히려 인공적으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문화적 기억’ 이란 제도적으로 공고화되고 조직적으로 전승되는 기억을 말한다. 아스만 부부의 문화적 기억 이론은 알박스의 ‘집단기억’ 이론을 보완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다. 그들의 비판적 견해에 따르면, 알박스는 집단기억에 의사소통 이라는 사회적 차원만을 부여함으로써 기억이 펼치는 시간적 지평 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한 사회집단은 자신들이 실제 체험 한 근거리 과거를 기억할 때 일상적 소통을 통해 그것을 현재화하고 구체적 정체성을 획득하지만, 그것이 ‘생생한 기억’으로 수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사회적 효력에서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 내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쟁취한 집단은 그들이 기억을 머나먼 기원’에 소급함으로써 그것의 배타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담지한 자기 집단의 보편적 정당성을 찾고자 한다. 그리 데 이러한 기원’은 현실 체험과 유리되어 있기에 신화적일 수밖에 없어, 이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기록물, 텍스트, 건축물, 도상, 묘비 사원, 기념비 또는 제의와 축제 등의 매체가 동원된다. 이처럼 진다. 기억은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급조되기보다 물질적 상징적 형식을 통해 보존되어온 전승을 원천으로 삼는다. 이 원천에는 오랜 시간의 양분이 농축되어 있다. 본래 고대 이집트 연구가인 얀 아스만은 바로 이러한 유서 깊은 기억을 문화적 기억 (kulturelles Gedächtnis)’이라고 지칭하며 이를 알박스적 의미의 의사소통적 기억(kommunikatives Gedächtnis)’과 대치시킨다. 집단기억을 이루는 이 두 기억 형식 사이에는 항상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동시대인의 생생한 체험과, 기원에 대한 신성화된 전승 사이에는, 일상과 신화 사이에는 갈수록 아득해지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얀 아스만은 그것을 인종학자 반시나(Jan Vansina)의 개념을 빌려 유동적 간격(floating gap)’ 이라 지칭한다.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이 간극을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생생한 기억은 객관화된 ‘문화로 변모한다. 이처럼 문화적 차원에서 형성되고 전수 되는 기억이야말로 일상적 현재와의 비동시성을 창출하여 시간적 지평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

결국 이러한 논의를 통해 분명해지는 점은 기억의 효력과 사회적 역할이 보기보다 훨씬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기억은 현재적인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텍스트나 이미지 또는 제례적 관행 등을 포 함하는 문화로서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기억은 일시적인 상황의 변화에 의해 쉽게 무화되지 않는다. 본래 영문학자인 알라이다 아스만 은 고대부터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기능, 매체, 보존방식의 변천을 규명하였다.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에 들어서면서 ‘의사소통적 기억’은 상당히 쇠퇴했지만 문화적 기억’은 오히려 새로운 전자매체의 시청각적 강렬함이나 예술의 감성적 환기력에 의해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스만은 ‘역사’ 또한 기억의 큰 틀 안으로 통합시킨다. 역사는 기능적 기억(Funktionsgedächtnis)’ 에 대립되는 ‘저장기억(Speichergedächtnis)’으로 자리매김된다. 전 자가 현재의 직접적인 요청에 적절히 기능 하도록 구성된다면, 후 자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적절한 매체를 통해 ‘저장’ 하여 보존함으로써 항시적인 부름에 응하고자 한다. 이처럼 아스만에게 역사와 기억 간의 경계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기억이 결코 만물에 편재하는 보편적 이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은 특정한 지배권력 에 의해 선택되며 항상 각각의 상황에 맞게 재편되는 유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기억이 가져다주는 ‘정체성’이란, 비록 문화적 원천에 근거하고 있더라도 가변적이며 단지 안정성을 가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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