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망각, 정체성

집단기억과 공간 및 시간 스키마 그리고 매체의 문제는 특정한 기억의 형성과 운용을 조건지우는 사회·문화·기술적 구성틀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본질적인 계기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망각이다. 기억을 위한 망각의 필요성은 매우 자명하다. 기억이란 본래 과거와 선택적으로 교우하는 하나의 방식이기에 특정한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정한 망각이 요구된다. 망각은 기억을 뒤따르는 그림자이다. 그러나 망각이 단지 이러한 차원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에 서 밝혔듯이, 기억은 과거의 존재와 비존재 간의 모순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과거를 지나가버린 것으로 확정지우는 행위, 즉 망각 없이는 기억은 매개해야 할 모순의 한 축을 결여하는 셈이 된다.

기억과 망각의 관련성

기억과 망각의 유기적 관련성에 대해 고전 역사학은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 드로이젠은 기억을 주관에 주어진 표상과 체험을 시간 순으로 조지 하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기억은 가장 인간적인 능력에 속했다. 이에 반해 망각이란 단지 이러한 능력의 결여에 불과했다. 이러한 드로이젠의 관점은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주창자인 딜타이(Wilhelm Dilthey)에게로 이어졌다. 딜타이는 이 새로운 과한 을 정초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 체험(Erleben)’을 강조했는데, 그 에 따르면 각각의 체험들은 바로 기억을 통해서 상호연관성을 얻게 된다. 기억이야말로 한 주체로 하여금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자아의 통일성과 확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드로이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딜타이에게서도 기억은 망각에 대해 우위를 점한다. 망각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견해를 선구적으로 제시한 이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였다. 그에 따르면, 망각이란 생에 기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주체의 정체성과 행위의 정향을 구축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망각이 어떻게 기억의 구성적 계기로 작용하는지 하는 내적 메커니즘을 밝히지는 못했다.

망각의 문제는 기억이 구성되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음을 알려준 다. 본원적인 체험은 그 자체로는 매우 비정형적이다. 이들은 늘 돌발적으로 이루어지며 대부분 파편처럼 분절되어 있어 상호 간에 양도될 수 없고 논리적인 연관성도 없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일차적인 기억은 불연속적이다. 이처럼 허술한 기억이 밀도 있게 구성되어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일단 그것과 거리를 두는 작업이 요구된다. 망 각행위란 본원적 체험을 개인적 또는 역사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그것과의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달리 표현하면, 망각 은 체험에 직접적으로 귀속되는 일차적인 기억을 ‘이차적인 기억으로 통합시켜내기 위한 구성적 계기이다.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을 가장 원리적으로 해명해주는 것 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는 기억으로부터 탈락되는 사소한 체험의 망각과 구별되는 좀 더 구성적인 망각을 ‘상흔(Trauma)’과 ‘억압(Verdringung)’ 개념을 통해 이론화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에도 뿌리를 내린다. 고통스런 체험에 대한 기억은 일단 무의식으로 추방- ‘억압’ – 된다. 그러나 억압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상흔’으 로 남아서 우리의 자아에 끊임없이 고통을 가한다. 그로 인해 의식적 자아(Ego)와 무의식적 자아(Id) 간에 갈등이 빚어진다. 꿈이란 바로 무의식적 자아가 억압시킨 기억이 일부 발산되어 상징적 이미지로 표출된 것이다.

프로이트에게서 억압이란 기억에 의해 조건 지어진 망각이다. 그 것은 기억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고 대신 무의식 속에서 반복되도록 강요(Wiederholungszwang)’ 한다. 억압된 기억은 자주 무의식적 행위(Agieren)로 표출되는데 그 중 일부는 정신질환의 증상을 띠기 도 한다. 기억에 대한 이와 같은 억압을 통한 저항(Verdringungswiderstände)’은 자발적인 기억을 저해하고 무의식적 반복’의 악순 환에 빠뜨리기에, 그것을 올바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구성작업, 즉 ‘기억작업(Erinnerungsarbeit)’이 요구된다. 결국 억압은 기억작업을 통하여 일차적 기억에 대한 반복의 강요’를 철회하고 이차적 기억을 구성하는 내적 계기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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