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인 산물

개인의 정체성은 그 자체가 사회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집단의 정체성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개별 정체성들이 다양한 상징’ 행위를 통해 상호 매개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의사소통, 이야기 서술, 종교적 의례, 예술적 형상화 작업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은 개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대개의 경우 권력층의 기억만 이 보편적인 기억으로 승화되고, 피지배층의 기억이나 여타의 불편 한 기억들에 대한 망각이 사회적으로 조직화된다. 물론 패전이나 국권상실 등과 같은 굴욕적인 과거를 애써 기억하는 집단도 있다. 이 경우는 희생자들을 불의에 항거한 순교자로 신성화함으로써 순결한 희생자로서의 집단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성원들을 집단적 목표에 동원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결국 이와 같은 점에서 볼 때, 집단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대시키는 동시에 축소시킨다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

한 개인이 자기 자신 및 세계와 맺는 관계는 논리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으며 다분히 역사적 성격을 띤다. 정체성은 지극히 근대적인 담론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정체성의 위기의 산물이다. 근대 에 이르러 기존 사회질서와 가치규범이 전반적으로 무너지면서 시간 속에서의 자아의 연속성과 행위의 일관성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 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근대의 정체성은 ‘주관적 성찰의 산물이기에 무엇보다 ‘주체’ 개념으로 대변될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와 민족 또는 계급 등과 같은 집단적 주체와 함께 개인이라고 하는 자립적 고립적 주체 관념이 포함된다. 양자는 상보적인 관계를 이룬다. 집단적 주체가 공적 담론을 통해 지배력을 얻어갈수록 이에 비례하여 개개인의 내성화된 주체의식도 확대된다. 근대인은 자신 만의 정체성(self-identity)을 추구하는 동시에 보다 포괄적인 집단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창조하려고 한다. 20세기 후반 이래 정체성 담론은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 기존의 민족적·인종적·사회적 질서와 가치규범이 지배력을 잃은 대신, 주변부적·반문화적·초민족적 문화들의 혼재양상(hybridity)’이 빚어지자 자율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정체성 또한 시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근대에 창조된 개인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은 점차 역사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여태껏 역사학은 정체성이 내포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단 지 기억만을 강조해왔다. 19세기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서구 역사가들 – 그리고 20세기 대부분의 한국 역사가들 – 은 민족이라는 집단 정체성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는데, 그들은 민족의 과거에 민족의 정체성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거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물론 계급이라는 상이한 집단 정체성에 주목한 역사가들의 경우도 이러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정체성이 객관화된 기억의 산물이라기보다 권력관계가 반영된 기억과 망각의 특수한 결합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역사가들이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기억, 망각, 정체성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는 역사가 집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학문이 갖는 위상을 되돌아보도록 고취시킨다. 원리적으로 볼 때, 과거에 대한 진정한 기억은 그것을 조건부로 망각할 수 있음으로써 비로소 완수된다. 과거를 기억하는 과정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원리는 역사가들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의 편협한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이미 그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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