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역사학

기억이란 기억에 대한 기억이다. 이는 역사가 역사의식의 역사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억과 역사는 모두 자기준거적인 특성을 지닌 다. 양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매개함으로써 시간성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들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실천적 범주에 속 한다. 물론 그것은 주체의 의도적 행위라기보다 그때그때의 권력 관계와 매체의 수준에 종속되는 시간체험의 양상이자 동시에 그러한 체험에 대한 자성의 과정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원리상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라는 관념은 인쇄매체의 산물로 등장하여 특수한 집단기억의 공간 스키마를 보편적인 시간 스키마로 변형시켰다. 역사와 (본래적) 기억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역사란 기억을 대상화

도표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역사란 기억을 대상화(객관화)하여 비판적으로 재구성해낸 가공물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역사는 기억의 조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는 자발적인 기억해 와 거리를 둔 채 그것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 신성한 권위를 해체-베버(Max Weber)의 표현을 빈다면 탈주술화(EntZauberung)’ – 해버림으로써 결국 본원적 기억을 변형시킨다. 이러 한 경향을 원리적으로 정식화한 것이 역사철학이라면, 이것에 과학 적 권위를 부여한 것이 바로 역사학이다. 17세기에 이미 비코는 변화하는 기억의 양상들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신과학’을 방법론적으로 정초한 바 있다. 역사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혁명의 시대인 19세기 초엽이었다. 이 새로운 과학의 중심부에는 ‘역사성’ 개념으로 대변되는 절대화된 시간의식이 자리 잡고 있어, 이제 모든 인류의 기억은 시간의 총체적인 질서에 따라 혁명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했다.

역사학은 ‘혁명의 시대가 불러일으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과학적 기제로서 등장했다. 거센 근대화의 물결로 인한 변화의 가속화 체험은 과거와 현재 간의 유대를 크게 손상시킴으로써 집단기억에 의한 과거의 재생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과거와 현재의 끈이 오직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재결속될 수 있게 됨에 따라 기존의 집단 정체성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 한 상황 속에서 역사학은 신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의 공고화에 기여한다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19세기에 역사학은 역사주의’ 의 호황과 더불어 최상의 정치적·문화적 지위를 향유했다. 변화를 해명하는 유일한 과학인 역사학은 철학자 니체가 ‘역사의 과잉’을 통탄했을 정도로 한 세기를 두루 풍미했다.. 이 시대 대부분의 서구 역사가들은 역사의 연속성’에 대해 확 신하며 스스로를 이 과정의 일부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은 변화의 물결에 휩쓸린 자기 시대를 올바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 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기말 이후 이러한 신념은 점 차 와해되기 시작했다.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이른바 ‘서 구의 몰락’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역사학 자체의 내부적 요인 도 이에 가세했다. 니체가 이미 염려했던 대로 역사학은 본래의 의도 와 달리 우리의 현재 삶과 과거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학은 과거를 순수한 인식대상으로 객관화하여 특정한 시간 좌표 위에 고정시킨다. 이에 따라 과거는 현재적 의미를 잃고 오직 전문가에 이 해서만 취급될 수 있는 특수한 대상으로 박제화된다. 현재의 요 구이 거리를 두고 과거의 고유성을 의식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현재가 과거와 분리되어 자립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매우 역설적인 현상 이지만 모든 과거를 역사화(historicizing)’ 하는 과학인 역사학은 이 처럼 탈역사화된 현재 의식을 낳는 주된 원천으로 작용한다.

20세기는 ‘반(反)역사주의’의 세기이다. 역사는 현실정치와 문화활동에서 더 이상 주도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이제 역사의 의미는 기껏해야 전문적인 역사책이나 박 물관 또는 국립공원 등에서나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무엇보다 현실적인 ‘역사’ 체험과 역사학’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설명했듯이, 20세기에 몰아닥친 거대한 변혁의 소용돌이, 그리고 철학 자 니체가 비꼰 이른바 ‘골동품적’ 역사인식이 과거와 현재의 유기 적 연관을 해체시킴으로써 집단 정체성을 마비시킨 주요원인이다. 20세기 말엽에 이르러 기억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활기를 띠 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적 위기에 직면해서이다. 기억은 역 사학이 더 이상 책임지지 못하는 정체성 형성의 역할을 떠맡기 위해 새로이 부름 받았다.. 기억은 자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 고 순전히 임의적으로 촉발되는 것만은 아니다. 앞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통해 밝혔듯이, 기억은 일차적 차원을 넘어서 기억 작업의 형태로 실행되는 한, 다분히 자성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기억은 역 사보다 훨씬 폭넓고 심도있게 과거와 대면한다. 기억이야말로 우리 의 생과 역사, 실천과 사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매개할 수 있는 최적의 카테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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