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역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기억작업이 과연 역사학의 역할을 전적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피에르 노라처럼 기억을 한계에 다다른 역사학에 대한 보완책으로 자리매김 하는 경우, 피터 버크(Peter Burke)처럼 역사를 ‘사회적 기억’으로 규정하여 역사와 기억을 수렴시키는 경우, 또는 이와는 반대로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처럼 역사학을 임의적인 기억 을 교정할 수 있는 비판적 기제로 상향평가하는 경우 등과 같은 상이한 관점들의 혼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는 점을 알려준다. 기억이 역사학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학의 고유한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미국 역사가 찰스 마이어(Charles S. Meier)의 선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고 치자. 기억의 ‘홍수’에 직면하여 과연 누구의 기억이 보존되어야 하며, 누구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야하고 누구의 역사가 서술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히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이 필수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기 억이란 본래 개인이나 특정집단이 자신만의 과거와 대면하는 형식이기에 이러한 역할을 맡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본래 자성적이 서 격을 띠는 기억은 시간의식의 본원적 양태로서 역사적 시간의 근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억에 대한 진정한 성찰은 역사학 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역사학은 변화의 과학으로서, 기억처럼 현재의 요구에 따라 과거를 소환하기보다, 시간의 변 화에 따른 다양한 체험 양상들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상호 비교·검 토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이야말로 과거에 존재했던 각각의 일시적인(contingent) 현재들 속에서 인간실존의 고유성을 해명할 수 있는 최상의 기제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설정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그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역사가에게 자신의 일상적 작업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자극한다. 작금의 역사가는 자신이 그토록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대상인 역사가 다양한 재현형식들로 분산되어, 역사에 대 한 과학이 그 존재근거를 잃어버리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이제 많은 역사가들은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 기보다, 일찍이 집단기억이 의존했던 이미지들 아니면 사적인 체험의 편린들을 서술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구술사(oral history)나 심리사(psychohistory), 전기 서술, 또는 역사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경향 등을 들 수 있다. 이제 기억은 역사학과의 새로운 결합을 요구하고 있다. 기억 논의는 또한 역사학의 경계를 넘어 예술, 문학, 정치, 사회, 종교, 법 등을 새로운 연관 속에서 보게 하는, 문화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야흐로 진정한 학제 간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화적 기억’ 개념을 다시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기억의 주창자들은 신화와 역사의 실재가 결코 과거에 놓여 있지 않으며 항상 새로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역사는 항상 여타의 문화적 형식들과 더불어 형성되고 사라진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에 대한 오래된 맹신을 깨뜨려주며, 역사를 역사학의 전유물로 보는 기존의 관념을 타파하여 다양한 문화과학들에게로 개방시켜준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학 이 떠맡아야 할 고유의 사명이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 특히 문화적 기억이 본래 자성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기억에 대 해 성찰하는 기제인 역사학은 기억에 대한 기억작업으로, 다시 말 해 일종의 메타기억’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미 ‘기억의 터’ 연구가 암시해준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역사가 획슬레(Otto Gerhard Oexle)가 ‘근대의 문화적 기어 6 의 역사적 문화과학’을 제창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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