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와 기억문화

기억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이 역사학적 결실을 거둔 선구적인 예로 1980년대 중반부터 서구 역사학계에서 활발해진 ‘역사 문화(historical culture; Geschichtskultur)’에 대한 연구들을 들 수 있다. 이 개념은 영미권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 본래의 추상성을 벗어나 광범위한 역사 연구의 지반 위에 뿌리 내리게 되었다.58) 역사문화 개념은 역사의 가치가 하락하는 새로운 양상에 직면하여 제기되었다. 역사는 ‘문화재 산업으로서 새로운 호황을 누리게는 되었지만 임의적으로 인용, 복제, 소비됨으로써 기 존의 숭고한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역사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화석화된 과거의 유물에 대한 값싼 호기심이나 물신주의 (fetishism) 경향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역사는 더 이상 과거의 부단한 재해석 이 아니라 냉소주의자들이 벌이는 공허한 게임으로 전락했다. 이 제 역사의 총체성이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역사적 유물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생성된 역사문화 개념은 척박한 현실을 역사학적 지평을 확대시키는 계기로 활용했다. 역사문화는 과거를 재현하는 다양하고 상호보완적이며 교차하는 형식들에 대한 집단명칭 으로 역사를 과거에 존재했던 ‘실재’로 보지 않고 오히려 현재하는 문화의 표현으로 보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문화란 결 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요소들의 교체에 따라 항구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역사가가 이러한 신개념을 자신의 작 업에 끌어들인다면, 이전처럼 과거의 객관적 진실이나 역사의 연속성에 대해 논하기보다, 과거를 재현하는 다양한 매체와 방식들에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역사문화 개념은 역사에 대한 자성을 촉구함으로써 곤경 에 처한 역사학에 활로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역사’라는 관념 자체가 무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것을 다소 변형시킨다 하더라도 여전히 미봉책에 불과하다. 역사 문화에서는 ‘역사’와는 뚜렷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기억형태 들이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독일의 기억문화(Erinnerungskultur)’ 개념이다. 이 개념은 얀 아스만이 제시한 ‘문화적 기억’ 개념과 유사한데 실제로 그는 양 개념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기억문화 개념은 기억이 개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를 위해 공동체마다 고유한 문화적 형식이 동원되고 또 새로이 창조된 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개념을 방법론적 원리로 채택함으로써 비 로소 역사의 제한된 테두리를 넘어서, 특수한 기억을 매개로 결속된 ‘기억공동체’의 문제나 기억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 과정, 그것을 조건지우는 문화적 가치체계, 그리고 기억의 예술적 형상화와 그 매체 등이 논의될 수 있게 된다. 역사문화 및 기억문화 연구는 다양한 주제 영역에 걸쳐 있다. 그 중 대표적 사례로 근대의 ‘전통’ 관념에 관한 연구들을 꼽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전통(tradition)’은 관습(custom)’과는 전혀 다른, 다분히 근대적인 역사문화에 속한다. 근대 이전까지 모든 인륜 세 계는 관습에 대한 깊은 경의에 기초해 있었다. 인습(convention)과 관례(routine)를 포괄하는 관습은 과거의 지속적 힘에 관한 유증으로서 현실문화에 대해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습의 힘에 의존하여 전근대적인 기억술은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 을 범례화된 사건이나 인물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기억술은 근대 역사학처럼 기원’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대신 특수한 공간스키마를 발전시켰다.

전통은 과거와의 단절

이처럼 관습을 살아 있는 과거라고 할 수 있다면 ‘전통’은 이와 달리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전통은 현실적인 단절을 은폐하기 위해 부각된 정신적 연속성이다. 관습이 기술적(技術的)이라면 전통은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기보다 오히려’발명된 것이다. 과거의 관습들이 현존한다면 굳이 전통을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은 역사학과 더불어 근대적 역사문화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로 등장했으며, 역사학의 배후에서 집단기억의 양분을 수취하여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의 상속법에 나오는 traditio’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물질적·정신적·정치적 차원을 포괄하는 ‘상속’을 의미했다. 근대에 이르러 전통은 정신적 유산이라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

전통의 발명은 과거의 특정한 측면을 부각시켜 형식화하고 의례화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대에 만연 했던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 민족 전통에 대한 광범위한 ‘발명’이 이루어졌다. 각종 기념비 건설과 경축일 제정 그리고 민족사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현실정치적 차원에서 볼 때 민족 전통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이 건설된 민족국가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상이한 수준의 개인들이 민족국가 내의 여타 형제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현상은 사회관계의 구체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촉구된 것이다. 자민족 고유의 문화’라는 발상은 가상 의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효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쉽사리 실용적인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장기간의 반복적인 실행을 통해 현실문화로 뿌리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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