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에 대한 연구

역사·기억문화 연구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사례는 ‘기념 (commemoration; Gedenken)’ 에 대한 연구이다. 전통에 대한 연구 에 비해 이 분야는 연구대상을 보다 명확히 설정할 수 있다는 장점 이 있다. 기념은 공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으로, 주체적 의식 이 두드러지는 행위영역이다. 물론 전통과 마찬가지로 기념행위 역시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세계와의 유대를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역사학적 재현과 달리 기념행위는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증거가 순전히 경험적 내용물이라면 기념은 이와 달리 제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증거가 내용적이라면 기념행위는 형식적이다. 기념은 집단기억이 발현되는 장으로서 통합이 아닌 배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특정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배타적 행위이다. 근대에 이르면 보편집단의 추상적 기억인 ‘역사’ 관념이 팽배해지면서 개개인의 기억은 기념행위와 유리되어 사적(私的) 공간으로 처소를 옮기게 된다. 이러한 양상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예로 자서전 집필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집단기억의 정치적 활용

기념행위를 필두로 한 집단기억의 정치적 활용은 현재 역사·기억 문화 연구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특히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독일 역사학계에서 ‘역사정책(Geschichtspolitik)’ ‘과거정책(Vergangenheitspolitik)’ ‘기억정책(Erinnerungspolitik)’ 등의 주제명으로 통한다. 개개의 공동체는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항상 과거에 대한 담론에 의지하게 마련인데, 그러한 담론은 현재의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특정한 권력정치적 의도를 수반한다. 공중(公衆) 앞에서 과거를 논하는 일은 대부분 공중을 동원하고 정치화하여 그들에게 특정 정치노선을 정 당화하는 효과를 노린다. 이러한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적 신화 의 창조, 기념비 건립, 경축일이나 제의, 축제의 연출, 전통의 규정, 이와 관련된 각종 제도의 마련과 법적인 조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은 단순히 정치적 행위의 장식물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로 자리매김된다.

이제 역시문화와 기억문화 연구는 역사학의 신경향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하면 주로 1980년대 미국 역사학계에서 유행하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용어는 역사 연구를 위한 활로를 개척하기보다 마치 정치구호처럼 전투적인 언설과 일면적인 대립구도만을 양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성급한 주장은 보 다 견고한 과학적 개념틀과 이에 상응하는 이론 및 방법론 체계가 마련됨에 따라 점차 입지를 잃게 되었다. 향후 역사 기억문화 연구는 다양한 문화과학 간의 상호소통에 힘입어 더욱 진척될 전망이며, 무엇보다 박물관, 기념비, 축제, 회화 그리고 역사 텍스트 등과 같은 주제영역에서 주도적인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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