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에서의 역사와 언어

역사 서술의 이야기적 측면에 관해서는 이미 전통 역사학에서도 이론적인 논의가 있어왔다. 물론 이때 이야기에는 항상 실용적 역할 만이 주어졌을 뿐 역사 서술 자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지위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것이 19세기 독일 역사가 드로이젠(Johann Gustay Droysen)의 『역사학 총론 (Historik)』이다. 실용주의적 역사 연구자에 의해 쓰인 이 최초의 총괄적 역사이론서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획득된 인식을 기술하는 하나의 양식으로 이 야기를 자리매김했다. 즉 그것은 탐구적(untersuchend) 이야기적 (erzalend) 교육적(didaktisch) 담론적(diskussiv) 서술양식 중 하나, 이다. 탐구적 서술양식이 연구의 결과를 충실히 기술하는 것이고, 교육적 담론적 서술양식이 현실적인 효과에 중점을 둔 것인 반면, 이야기식 서술양식은 가장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연구의 결과물을 정돈하여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운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다. 이처럼 드로이젠에게서 이야기는 역사 서술의 모든 것이 아니며 단지 도구적 기능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 역사가들의 이야기식 서술에 대한 찬반 논쟁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드로이젠의 관점

그러나 드로이젠의 역사이론은 후대 역사가들의 실용적 관점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역사가가 어떠한 서술양식을 채택하는가는 그에게 주어진 경험자료의 성격보다는 그의 정치적 견해나 세계관 등과 같은 인식관심에 달려 있다. 과거란 벙어리와 같아서 스스로 말하지 못하며 오직 역사가의 서술을 빌려 말해질 수 있을 뿐이다. 과거 스스로는 역사 서술을 위한 객관적 기준을 창출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자신의 주관에 따라 주어진 사실들에 내적 연관성을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경험주의적 역사가들이 갖는 소박한 반영론은 부정된다. 이야 기식 서술양식에도 역사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된다. 역사 이야기가 일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끄는 ‘이념(Idee)’ 이 마땅히 있어야 한 다. 역사가가 탐지하는 이념이 이야기 전체의 질서를 규제한다. 경험적으로 확증된 자료들은 이념이 생성, 변화되는 과정으로 재구 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끝에서 처음으로 역행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는 이야기의 종결을 미리 설정함으로써만 비로소 이야 기를 시작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 이야기는 역사가의 독창적인 구성작업을 거쳐 창조된다는 점에서 ‘예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드로이젠의 역사 이야기 이론은 비록 도구론적 견해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역사 서술의 고유한 구성적 성격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는 적극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의 이론은 독일 특유의 역사 적 해석학(Hermeneutik)’의 방법론이 정초되는 데 기여했다. 영미 권의 내러티브 논의에 선행하여 그와는 전혀 독자적인 차원에서 해석학은 역사와 언어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것은 본래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독특한 이해(Verstehen)’의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역사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연구방법론상의 근본원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이란 자연적 사물과는 달리 언어적 상징적 –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런 만큼 그 속에는 이미 내면성(Innerlichkeit)’, 즉 인간의 자기 스스로에 일정한 이해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역사를 이해하고는 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자기이해를 이해하는 것이다. 역사학에서 해석주체와 해석대상은 친화성을 갖는다. 양자는 ‘선현 적(transzendental)’ 차원에서 결합된다. 언어로 매개된 인간의 자기 이해가 다시 언어를 매개로 더 높은 자기이해로 상승해가는 과정이 곧 역사이다. 이처럼 역사는 본질상 자기준거적인 만큼, 항상 인식 된 역사’ 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는 헤겔(G. W. F. Hegel) 식 동일성 철학의 잔재로 볼 수 있다. 드로이젠에 따르면, 역사가라는 인간존재가 과거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모두 ‘인륜세계의 운동인 ‘역사(die Geschichte)’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드로이젠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관점을 역사학의 방법론적 원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역사학 특유의 방법을 탐구적 이해(forschend zu verstehen)’라고 규정한다. 인식주체는 사료를 통하여 개별 인식대상들을 과학적으로 ‘탐구’ 하는 동시에 사료의 언어에 표현된 각 개체의 내면적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결국 역사적 연관(Zusammenhang)’의 인식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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