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과 역사학의 관계

철학자 딜타이(Wilhelm Dilthey)는 역사학을 선두로 하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이 법칙론적인 자연과학이나 구조-기능지향적인 사회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론적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라는 정신적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과론적 설명 (Erklären)’ 보다는 직관적 ‘이해(Verstehen)’가 필수적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체적 형상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역사 과정이 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정신적 지평을 자신에게는 이질적인 세계의 이해를 통해 확장함으로써 항상 더욱 고차원적인 이해의 형식들을 발전시킨다. 이처럼 이해를 매개로 역사의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은 통일성을 이룬다. 따라서 이해란 역사 인식을 위한 방법임과 동시에 역사 진행의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이해의 방법과 원리에 기초한 정신과학은 개인의 주체적 의미 부여가 역사 전체의 의미와 결합되는 다양한 형식들을 규명한다. 유사한 견지에서 신칸트주의자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는 역사의 인식론적 성격을 ‘개성기술적(idiographisch)’이라 규정했다. 그것은 법칙정립적(nomothetisch)’인 자연과학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뤼제의 해석

해석학의 ‘이해’ 이론은 역사학의 독자적 원리를 부각시키는 데 있어서 분명히 효과적이었지만 독일 관념론 특유의 형이상학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자칫 역사학을 합리적 절차에 따른 연구 보다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직관에 의존하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드로이젠의 역사이론 해석의 권위자인 뤼젠은 이러한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다소 변형된 해석학의 관점에서 역사 서술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드로이젠의 ‘탐구적 이해의 원리가 과학적 연구와 의미의 이해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는 양자의 매개 고리로서 내러티브 구성’을 제시하며 이것이 역사 인식 의 토대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사실은 내러티브의 구성방식 에 따라 상이한 성격을 띠게 된다. 뤼제에 따르면, 역사학이란 본래 해석학적 의미의 형성(Sinnbildung)’을 지향한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경험에 의미를 부여하여 행위의 지침을 마련하고 정체성 형성 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에 부합하는 서술형식이 바로 이야기이다. 뤼젠은 이야기가 지닌 감성적 호소력을 강조한다. 역사 이야기는 본성상 미적이라기보다 ‘수사적’ 이다. 미적 카테고리가 상상력의 발동과 관계된다면 수사는 구체적인 행위를 촉구한다는 것 이다. 물론 이러한 수사적 형식이 역사 인식의 과학성을 저해하지는 않는다. 명석하고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 구성’ 이야말로 역사 인식 을 합리화하는 근간이다.

해석학은 역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천착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문제를 기능적 차원을 넘어 역사학의 기본원리에 비추어 해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역사학의 본령이 언어를 통해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면 과거의 언어적 재구성이 이러한 이해의 한 계기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정당하다. 서술의 영역은 역사학의 취약성 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고유한 과학성을 보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 이다. 이처럼 해석학을 통해 역사 서술의 문제는 인식론적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서 정작 역사 서술을 일상 업무로 삼는 역사가들이, 드로이젠 이후 뚜렷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를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